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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15-10-14 02:00
    국내 유흥가이드 ※서울특별시※ - 서울 유흥의 역사-
     글쓴이 : 오피캐슬
    HIT : 2,555   추천 : 0   비추천 : 0  
    대한민국 유흥가이드 <서울특별시>

    -서울 유흥의 역사-

    대한민국 구석구석에 남성들을 유혹하는 많은 유흥업소가 자리잡고 있다. 자신이 거주하거나 자주 방문하는 지역은 쉽게 찾아갈 수 있고 어느 정도의 정보는 가지고 있다. 하지만 처음 방문 하는 지역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래서 우리는 대한민국 유흥 가이드를 제작해보려고 한다. 현재까지 인천 ,대전, 대구, 울산, 광주, 부산까지 전국 6개 광시의 유흥가이드를 발행하였다.

    이번 유흥가이드를 작성할 도시는 대한 민국의 수도 서울특별시이다.

    서울의 경우는 요즘 쉼터와 같은 유흥정보를 공유하는 사이트가 많이 생겼기 때문에 다른 지역보다 손쉽게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찾은 정보가 믿을 수 있는 정보인지, 그렇지 않은 지는 본인의 판단일 뿐 만약 내상을 당하게 된다면 누구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이 글이 서울을 방문하고자 하는 많은 회원들과 유흥을 아직까지 많이 알지 못하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로 서울 지역 유흥가이드를 시작하겠다.

    그렇다면 먼저 서울에 유흥(윤락업소)이 진출된 역사에 대해 알아보자.

    윤락업소의 서울 진출

    윤락업소가 서울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청일 전쟁 이후의 일이다.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난 뒤 청나라 군대가 조선땅으로 들어오자 일본도 서울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그 곳이 용산구 효창동 원효로 일대이다. 이 시기에 일본 군대에 물자를 조달하는 상인들이 늘어나면서 윤락업소라고 할 수 있는 대좌부업과 여인숙, 특별요리점 등 성매매 관련 업종이 번성하기 시작했다.

    성매매 여성을 고용해 알선하는 것이 대좌부업이라면 특별요리점은 각종 요리와 술을 제공하며 여성의 성을 판매하는 업소였다.

    또한 대합이란 것도 있었는데 대합의 본래 뜻은 기차역 대합실처럼 잠시 얘기하거나 사람을 만나는 장소를 일컫지만 실제로는 대좌부업과 같은 윤락업소로 남녀가 밀회할 방을 빌려주고 술과 음식을 제공했다.

    즉, 쉽게 풀어 설명하면 대좌부업은 사창가, 특별요리점은 주점, 대합은 여관바리 정도로 해석하면 되겠다.
    19세기 말 용산구 일대에는 13~14개의 대합이 있었으며 바람난 유부녀, 기생, 창녀와 일본군 사령부의 병사들이 단골이었다.

    한편 서울 남산의 진고개에도 일본인 거류지가 생겨다. 진고개 일대는 남산에서 구리개(현 을지로)방향으로 내려오는 산줅에 위치한 곳으로 일본 공사관이 위치하고 있는데다 땅값이 저렴했기 때문에 임오군란 이후 일본인 집단 거주지로 나름 최적의 요건을 갖춘 곳이었다.

    일본인들은 청일전쟁 즈음하여 서울 중심부로 진출하기 시작한다. 1894년 한 일본인이 남대문에 잡화점을 개설한 뒤 일본인 상점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청나라 상권이던 남대문 일대의 상점들을 접수하면서 생활의 터전도 점차 남산에서 남대문 일대로 옮겨졌는데, 일본 거류민들이 늘어나면서 대좌부업과 특별요리점이 늘어나기 시작한다.

    하지만 당시 조선인 여성은 일본인이나 청나라인 등을 상대로 성을 팔려고 하는 여성이 없었기 때문에 성매매를 거의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 조선인 남성들이 일본 대좌부와 특별요리점에 출입하기 시작하면서 성병에 걸리는 등 사회문제로 야기되기도 했다.

    성매매가 사회문제가 되면서 일본 정부는 대좌부업이나 특별요리점들을 한 곳에 모으는 집단지역을 설정하기 시작하는데 윤락업소들이 한 지역으로 모이는 집창촌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집창촌이 서울에 등장한 것은 러일전쟁 직후이다. 일본은 청일전쟁 때보다 4배나 많은 군대를 서울에 진격시켰고, 군수업자들과 건설업자들이 몰리면서 이들이 서울 남산 부근인 쌍림동(현 중구 묵정동 소피텔 앰버서더호텔 부근)에 신정유곽을 설치한 것이 시초이다.



    <사진1 신정유곽>

    1904년 신정유곽 내에 제일루라는 업소가 문을 연 것을 시작으로 충무로1,2가는 물론 소공동, 태평로 등지에 흩어져 있던 사창들도 이 곳으로 업소를 옮기면서 쌍림동에는 20여 채의 유곽이 들어섰다. 

    유교적 전통을 갖고 있던 조선 사회에 유곽의 등장은 커다란 문화적 충격이었다. 그리고 점차 일본인 여성들은 물론 조선의 기생, 창기들도 성매매에 나서면서 여러 가지 사회문제가 발생했다. 특히, 성 판매에 나선 창기들의 거주지가 여러 주택가에 흩어져 있어 일반 백성들 사이에 매음이 번졌고, 외국인들이 가정집에 들어와 창기를 찾는 경우도 생겼다.

    이에 대소룡동, 종현, 저동은 조선시대 기생을 길러내는 장악원이 위치해서 많은 창기들이 거주했는데, 이는 조선인 거주 지역에 생긴 최초의 적색지대이며, 대한제국이 실시한 최초의 집창촌 시도였다.

    또한 러일전쟁 이후 창기들의 거주지를 훈도방 시동(현 을지로 3가동)으로 제한하는 조치를 취했는데, 당시 창기들이 갑작스레 시동 일대로 집단 이주를 하여 집값이 껑충 뛰어오르기도 했다.

    1906년 통감부를 설치한 뒤, 일본은 일본인들이 많이 사는 곳에 거류민단을 설치하고 이 곳 중심으로 도시를 발전시켰다. 

    서울은 용산에 1907년 9월에 거류민단이 생겨났는데 제일 먼저 벌인 사업이 성매매 전용 업소인 유곽의 설치였다. 여기에 재정확보라는 명목으로 처음 문을 연 유곽이 용산구 도화동의 미생정 유곽, 일명 모모야마 유곽이다.


    <사진2 모모야마 유곽>
     
    용산은 당시 일본군 사령부와 조선 철도국이 위치한 남산의 진고개와 더불어 일본인들이 가장 많이 살던 지역이다. 이들은 처음 원효로1~4가에 집단 거주하다 점차 신계동, 도원동으로 이동했다.

    모모야마 일대는 복숭아 나무가 많았던 언덕으로 현재 도원동 지역이다. 모모야마 유곽은 1914년 지명이 미생정으로 바뀌자 이후 미생정 유곽으로 불렸다. 같은 해 인근 용문동 대도정에도 유곽이 들어섰다. 미생정과 대도정은 용산의 양대 유곽으로 성장했으며, 미생정은 일본인들이, 대도정은 조선인들이 주로 이용했다.

    현 서울역 건너편인 도동에도 1907년쯤 매춘업을 겸한 작은 요리집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20세기 초 생성된 도동 유곽은 하급 요리집 중심이었다. 요릿집이 하나 둘 모이면서 신지라는 유곽이 생겨났지만 경찰의 단속 등으로 인해 뒤에 묵정동의 ‘신정’에 통합됐다. 당시 태평로와 구리개(현 을지로), 청파, 황금정(현 명동) 등에서도 ‘왜갈보’라고 불리는 일본인 하층 윤락 여성들이 밀매음을 하기도 했다.

    이후 1920~30년대 커피와 함께 술도 파는 카페가 등장한다. 술과 안주를 먹는 것이 아닌 여자 종업원가 마주앉아 대화나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 지금의 바의 개념이라고 볼 수 있겠다.

    카페의 여종업원은 월급이 적었다. 따라서 여종업원은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억지웃음이나 애교를 부려야 했고, 또한 에로 서비스(몸을 파는 일)도 해야만 했다. 1930년대 명동 지역에는 일본인의 출입이 많았으며, 종로3가에는 조선인들의 출입이 많아 해당 지역에는 다방이 많이 존재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여종업원 중 상당수가 사창의 여성이었다. 또한 독일여자와 러시아 여성을 고용했다 벌금이 부과된 사실도 있어 외국인 접대여성도 존재했다.

    특히 앞서 설명했던 카페와 다방문화는 종로3가 일대에 번성했는데, 이 때 당시 카페를 비롯해 공창과 사창의 수를 합치면 580여개에 달했고, 창녀의 수는 7,800여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점차 유곽이 늘어나게 되고, 유곽에 대한 사회문제화 되자 1920년대 말부터 유곽의 폐혜를 지적하며 공창 폐지 운동이 거세게 일어나게 된다. 특히 학교 인근에 위치하던 유곽은 교육의 문제로 이전 요구가 거세게 벌어졌지만 당시에는 실효를 거두지는 못한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해방직후 북한 지역엔 유곽이 폐쇄되었던 것에 반해 남한 지역에선 유곽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여론에서 공창을 폐지하자는 의견이 들끓었다. 이에 미군정은 ‘부녀자 매매 또는 그 매매계약의 금지’를 법령으로 제정, 발표했다. 하지만 ‘인신매매(성매매)를 금지할 뿐 공창제를 폐지한 것은 아니다’라고 밝혀 미군정 당국은 공창제를 폐지할 의도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명목상 성매매는 금지됐으나, 유곽은 존치했기에 마땅히 갈 곳이 없던 성매매 여성들은 다시 유곽으로 돌아간다. 그에 한 여성단쳬에서 신정유곽과 미생정 입구에서 유곽 입장을 방해하는 유인물을 나눠주기도 했다. 

    그에 1946년 7월 신정유곽은 여관으로 전업을 하게 된다. 그리고 소속 창녀들은 그대로 식모로 채용하기로 해 양두구육 격으로 간판만 교체하게 된다. 옛 유곽이라는 공창에서 간판만 갈아 걸고, 사창으로 변질된 것이다.

    결국 1948년 2월 공창제는 완전히 폐지되었고, 서울시내 500여명의 창녀들은 밖으로 뛰쳐나오게 된다. 하지만 빚이 많았던 묵정동의 창녀들은 아직 그대로 머무를 수 밖에 없었다. 이 때 묵정동의 창녀들을 재미난 요구를 하게 된다. ‘인당 평균 18000원의 빚이 있으니 이를 국가에서 갚아줄 것, 취업을 알선할 것, 취업이 될 때까지 자신 가족의 생활을 보장해줄 것’ 등을 요구한다.

    하지만 정부에서는 개인의 빚은 갚아 줄 수는 없지만 취업알선은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겠다고 하였다. 또한 가족의 생활까지도 보장을 해줄 수는 없다고 했다. 단, 임신중인 창녀에 대하여서는 적극 도움을 주겠다고 언명하였다.

    1950년대 이후로는 유곽이라는 단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고 창녀라는 단어로 사용이 달라진다. 유곽시절에는 기녀라는 표현으로 아무에게나 몸을 팔지 않는 정절의 의미로 사용되었으나 한국전쟁의 도화로 종로3가 사창가의 밑거름이 됐다. 당시 전쟁으로 인해 산업 전반이 불경기에 시달렸지만 성매매만큼은 예외였다. 

    195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한반도 성문화의 대명사였던 신정 유곽의 명성도 조금씩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이 때 유행하기 시작한 말 중 종삼과 이봉익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신정유곽이 쇠퇴하면서 종로3가와 양동, 동자동 일대가 최대 사창 집결지로 떠오르게 되었기 때문인데, ‘오입하러 종로3가에 간다’는 말 대신 ‘종삼이네 간다’ 라는 말로, 또 ‘종삼 옆에 봉익동에 간다’라는 말 대신에 ‘이봉익을 만나러간다’ 라고 할 정도로 종삼에서 봉익동에 이르기까지 사창가가 번성했다. 


    <사진3 종삼의 모습>

    여기에서 말하는 종삼은 현 단성사 인근에서부터 비원으로 들어가는 입구까지라고 보면 된다. 그리고 봉익동은 종로3가역 종묘가 위치한 탑골 공원 바로 옆이다. 

    이때 당시 종삼 일대에만 500여명의 창녀들이 집결했다고 하니 과히 규모가 상상했던 것 보다 크다.



    <사진4 종삼입구>

    1955년 8월 25일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사창굴’은 비단 ‘봉익동‘ 이나 ’종삼’에만 있는 것은 아니며 골목마다 우굴우굴하다며 해방 10년의 최대 특산물은 ‘사창’이라는 평가도 있었다.

    서울에만 종삼, 봉익동을 비롯 창신동 노벨극장 주변과 청량리시장과 역 주변, 서대문 신촌, 청계천변일대 및 묵정동, 명동, 회현동 등도 꼽혔다. 또한 서울의 관문인 서울역 주변인 양동과 도동, 쌍림동, 봉래동 일대와 용산역, 삼각지 일대의 군인을 상대하는 여성들과 이태원 미군을 상대하는 양공주까지 서울시내에 뻗치지 않은 지역이 없을 정도였다.

    그리하여 1955년 12월부터 내무부장관은 12월 15일부터 1월 15일까지 1개월동안 전국의 사창굴을 근절하기로 하여 사창굴 발본색원을 단행하겠다고 언명하게 된다.  

    단속이 시행되지만 사창은 근절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시기에 주 1,2회씩 성병검진을 받던 매춘부들이 단속의 눈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사창행위를 하고 있어 성병이 사회문제로 야기되기도 했다.

    한편 이 때 당시 종삼, 봉익동과 함께 양동 일대와 묵정동 일대도 사창의 최대 집결지로 손꼽혔는데, 묵정동 일대에는 22개의 바락건물에 150여명의 창녀가 모여 있었고, 양동 일대에는 어린 시골처녀들이 많았다고 한다. 양동 일대는 현재 회현(신세계백화점)- 남대문시장에서부터 서울역 인근까지 인데, 판자촌 앞에서 성매매를 행했다고 하며, 서울역전에서 ‘하숙집가세요’ 라는 멘트로 손님을 끌었다고 한다. 

    이에 1958년 6월부터 일제 단속이 다시 재개된다. 오류동에 500여명을 수용할 있는 직업보도소를 신설하여 잡아들인 창녀들을 수용, 교육 시킬 것이며, 일부는 귀향조치나 취직조치도 겸한다고 했는데 이 때 당시 정부 당국에서 파악한 창녀의 숫자는 3천명이었으나 실제로 서울의 창녀는 3만명도 넘을 것이며, 창녀를 수용하기엔 너무 터무니 없이 부족할 것이라는 게 대다수 전문가들의 추측이었다.

    그렇게 단속초기부터 포주들을 구속하여 엄벌에 처한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구류3일에 처하는 것에 그쳤고, 구류를 살고 나온 뒤 다시 성매매을 일삼게 된다. 결국 뿌리 뽑겠다던 사창가는 점점 더 커져갔다. 

    결국 뿌리 뽑겠다던 사창가 단속에 정말로 틀이 잡히고 있다. 묵정동이나 종삼에는 여자그림자를찾아볼 수 없는 사막이 되어 버린다. 다만 이 창녀들이 저녁에 삼각이 외국인 부대앞으로 이동해 양공주로 변신하게 된다. 

    그런데 오히려 단속으로 인해 사창은 정부의 눈을 피해 일반 주택가로 침범하여 밀매음을 계속하고 있다. 그나마 양성화되어 있던 사창이 음지로 숨어버리는 현상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이것은 정부의 단속 후 조치와 대책이 수립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는 시선이 많았다.

    따라서 창녀들이 되기까지의 신분과 창녀가 된 동기를 통해 창녀들에 대한 새로운 대책을 촉구하기도 했다.

    한국인을 상대로 하는 창녀가 40.9% , 외국인(군인)을 상대로 하는 창녀가 59.1% 였으며, 지역적 분포는 서울 20.9%(외국인 14.2%) 경기 3.3.%(79%) 강원 8.5%(0.6%) 충북 0.5$(0.8% 충남 5.2%(0.7%) 경북 10.7%(0.3%) 경남 40.6%(3.5%) 전북 4.4%(0.3%) 전남 4.8%(0.3%) 제주 1.1%(0.3%) 였다고 한다.

    창녀의 연령대는 13세부터 50세까지였으며, 그 중 23세부터 25세까지의 창녀가 으뜸이라고 전했다.  

    13세 0.2%(외국인 0%), 15세미만 1.3(0%), 18세미만 7.7%(4.7%), 20세미만 26.1%(14.9%), 25세미만 47.6%(31.1%), 30세미만 15.0%(27.3%), 35세 미만 2.9%(15.7%), 40세미만 0.1(5.5%), 45세미만 0.1(0.5%), 50세미만 0%(0.3%) 이었다.

    창녀가 된 원인은 생활고가 53.0%로 가장 높았으며 허영 14.6%, 취직실패 8.6%, 연애실패 자포자기 8.3%, 가정불화 6.1%, 유인당한자 5.8%, 기타 3.5%로 집계됐다.

    창녀전 신분은 처녀 49%, 상인28.1%, 일반미망인 19.3%, 회사군경미망인 10.1%, 내연으로 동거후 헤어진자 9.4%, 이혼자 9%, 내연의 남편이 있는자 4.1%, 남편이 있는자 3.2% 순으로 나타났다.

    신기한 것은 60여년 가까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이 몸을 파는 이유는 여전히 비슷하다는 것이다. 특히 허영이 15%에 달한다는 점이 특이한 점이다.

    1961년 시작된 제 3공화국은 경제 발전에 전념한다. ‘조국근대화’라는 명목으로 경제발전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희생을 시켰는데 그 중 하나가 사창이다. 제 3공화국은 ‘윤락행위 방지법’을 제정, 사창근절방침을 공표하고, 단속을 약속한다. 허가 받지 못한 사창을 단속하는 것이야 말로 자신들의 권력을 알릴 가장 자극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이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사창가 안에는 창녀에 기생하는 폭력조직이 있기 때문에 여성들을 구해내는 것이야 말로 정부의 정의로움을 알리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해방 초기 미군정의 공창제와 비슷한 선언적 의미의 성매매 금지였다. 윤락행위 방지법 시행령은 1969년 11월에 제정됐기 때문이다. 더구나 1962년 4월 내무부, 법무부, 보건사회부는 이태원 등 32개 기지촌을 비롯한 성매매 여성들의 집결지 104곳을 특정 지역으로 설치하고 특정 지역내의 성매매는 묵인하기도 했다. 

    서울의 특정지역에는 종로구 대묘동, 탑동, 성동구의 모진동(화양동)과 흥인동(신당동), 동대문구의 전농동, 영등포구 대방동과 문래동, 신길동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지역은 다른 지역의 창녀들까지 몰려 들어 붐비게 되었고 결국 종로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의 창녀 수는 급증하게 된다.

    한편 이 당시 명동에서는 길거리에서 취객을 유혹하는 여인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매일 밤 10시 이후 점잖은 부인복이나 젊은 여대생차림의 복장으로 서성거리며 남자 행인을 공공연히 유혹하기도 했다, 특히 10시 반부터 11시반 사이에 명동근처 Bar나 요정에서 술에 취해 나오는 남자 행인을 유혹하여 같이 택시를 타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거나 근처 여관에서 매춘행위를 하고 있었다.

    남산일대 장충단 공원을 중심으로 소풍객을 유인해 가려는 창녀의 수도 상당히 많았다고 한다.
    우동집, 빵집을 가장하여 매춘행위를 하는 일도 있었다.

    변칙적인 성매매가 현존하는 것이 아니라 50여년 전에도 있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1969년에는 콜 걸이 생겨난다. 무허가 직업소개소에서 요정에 취직을 시켜준다며 처녀를 꾀어 집단 감금시킨 후 일류호텔의 문의에 따라 외국인 상대 콜걸단이 적발된 것이다. 피해자는 4천원에 팔려온 후 콜걸로 전락했다고 밝혔다. 

    회현동과 북창동의 여관에서는 400여명의 콜걸이 장사를 벌이고 무교동에 있는 바 일부와 나이트 클럽에서 매춘을 유도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콜 걸이 대부분은 주택가에 침투, 일반 주민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다고 했다. 특히 종삼 폐쇄이후 대표적인 사창가 중 하나인 청량리 588에선 행인에게 달려들어 옷을 찢고 할퀴는가 하며 돈까지 빼앗는 등 행패가 심했다.

    이 때 창녀들이 주택으로 침투한 지역이 청량리 588, 성북구 하월곡동, 중화동 중랑천변, 구로동 일대의 숱한 대포집과 무허가 주점 등에서도 유객행위만 하지 않을 뿐 사창가와 다름없는 생태를 빚고 있는 것이다.

    미아리 텍사스가 이 시기에 생겨난 것이라고 보고 있다. 미아리 텍사스의 역사는 성북구 편에서 다시 다루어 볼 예정이다.

    이렇게 호객(유객)행위가 심각했던 것은 즉결심판에 넘기는 것 같은 솜방방이 처벌 때문이었다.

    이번 유흥가이드 서울 편을 조사하면서 1971년 서울에는 약국이 많이 생겼다는 자료도 찾았는데 동대문구 청량리나, 영등포 역전 앞에 [성병 일즉치]라는 성병약 선전이 많았는데, 이 지역엔 창녀가 많았다는 이야기였다. 즉, 사창가가 발달된 지역에는 성병치료제 광고 포스터가 많이 붙어있었다는 것이다.

    1967년 창신동 사창가는 폐쇄되었고, 무허가 판자촌은 철거되었는데 이는 도심지 창녀촌이 처음으로 사라진 케이스이다.

    창신동의 폐쇄는 작고 우연한 계기를 통해 이뤄졌는데, 당시 창신동에서 윤락업소를 운영하던 여성이 경찰에 지속적인 금품상납에도 불구하고 단속에 걸리자 ‘상납장부’를 공개한 것이다. 장부에는 그 동안 정씨가 관할 경찰관들에게 매월 상납한 돈의 액수와 날짜 등이 적혀 있었는데, 이 뿐만 아니라 정씨는 다른 포주 60명도 경찰에게 비슷하게 돈을 상납하고 있다며 경찰관 이름까지 폭로했다.

    진상조사에 나선 서울 시경은 동대문 경찰서 경찰관들이 금품을 수수한 사실을 밝혀내고, 해당 경찰을 파면, 구속하는 가 한편 폭로 1년 후 사창가 입구에 초소를 설치하고 24시간 교대근무를 통해 영업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로 인해 창신동 사창가는 폐쇄되었으며, 청계천 복개 공사를 하며 ‘청계 7가’가 됐다

    당시 단속을 피하던 창신동의 창녀들은 신당동 일대 판자촌과 신설동, 창신동, 무학동의 무허가 하숙집으로 분산되었고, 청계천 6가 오간수교 및 서울운동장 옆 신당동 입구로 창녀들은 계속 몰렸다. 

    신당동과 청계천 6가 오간수교 주변으로 옮겨간 창녀들이 대낮에도 길 가운데까지 나와 손님을 붙드는 일도 있어 사회문제로 대두되기도 했다.

    그리고 돈의동, 봉익동, 훈정동일대는 창녀가 계속 넘쳐 증가하게 되었으며, 창신동에서 쫓겨난 창녀들은 종삼, 양동, 도동 등지로 옮겨 갔다.

    한동안 상한가를 치던 종삼과 이봉익이 무너진 것은 1968년이다. 종삼의 철폐 역시 우연한 계기를 통해 급물살을 타게 되었는데 1968년 한 윤락 여성이 세운상가 건설현장을 둘러보고 있는 당시 김현옥 서울 시장의 팔을 붙잡고 “아저씨 놀다가요” 라며 호객행위를 한 것이다. 부산시장을 역임할 때 거침없는 추진력으로 ‘불도저 시장’ 이란 별명을 갖고 있던 시장은 바로 종로구청에 들어 ‘종삼 정화추진본부’ 설치를 지시했다.

    결국 종삼 적선지역철폐조치는 시작 4개월간의 집중단속으로 10월 5일 마지막 단속으로 돈의동, 훈정동, 묘동, 봉익동, 인의동 일대 끝까지 남아있던 창녀들을 검거하며 일단락을 짓는 듯 했으나,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해 주지 않아 6개월만에 다시 창녀들이 생겨났으나 종로를 찾던 소비자들은 이미 발길을 끊은 상태여서 곧 조용한 거리로 바뀌었다.

    창신동과 종삼 소탕에 자신감을 얻은 서울시와 경찰은 1969년과 1970년에 도동과 양동 철폐에 나선다. 한국전쟁의 혼란기를 틈타 급성장한 도동과 양동의 사창가에는 1967년에 382명의 여성을 포함, 포주와 펨푸(매춘 중개인) 등 1,000여 명의 여성들이 집단 거주하고 있었다. 이 곳은 직장을 구하려 상경한 여성들을 윤락녀로 타락시키는 악의 소굴이었다. 서울시는 양동 일대의 무허가 유흥업소를 식당, 숙박업소, 이발소 등으로 전환시켰고, 양동을 재개발하기로 한다.

    결국 양동과 도동은 윤락업소가 아닌 여인숙과 하숙집의 모습으로 바뀌었고 예전보다 한층 나이든 여성들이 몸을 파는 ‘여관바리’ 업이 본격 시작됐다. 이 곳이 현재 회현동 여관바리 골목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양동과 도동 집창촌까지 소탕된 후, 정부에서 파악한 서울 지역의 특정 지역은 총 8개 지역이고, 포주는 438명, 창녀는 2768명이었다. 그 지역은 다음과 같다.
    [청량리 588, 미아리 텍사스, 성동구 모진동, 용산구 이태원, 영등포역전, 공항동, 시흥동, 신설동]

    창신동과 종삼, 봉익동, 양동, 도동의 붕괴 되면서 포주와 성매매 여성은 성북구 하월곡동 미아리와 성동구(현 강동구) 천호동으로 이전한다. 월곡동은 본래 허름한 판자촌이었는데, 염색공장과 피혁 공장이 들어서면서 미아시장 뒤편의 정릉천 주변으로 양동과 종삼에 있던 포주와 창녀들이 월곡동으로 이전하게 된다. 또한 청계천 복개 공사로 인해 황학동 주변의 선술집 여성까지 모여들면서 윤락가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이 때까지만 하더라도 낮에는 선술집 영업을 하고 밤이 되면 윤락가로 모습을 바꾸는 형태였다고 한다. 선술집이 주업이 아닌 윤락업에 달린 부업 정도의 역할이었는데 선술집에 손님이 없으면 여관으로 불려가 성을 판매하는 여관바리도 했다고 한다. 당시 미아리는 6시부터 영업을 시작했는데, 깊게 패인 옷을 입고 손님들과 술을 마시다가 손님이 ‘누구를 데려가고 싶다’ 고 주인에게 말하면 여관으로 자리를 옮겨 갔다고 한다. 오늘날 단란주점이나 룸싸롱의 2차와 비슷한 형태의 영업방식이다. 

    이렇게 점차 윤락가로 명성을 얻게 된 미아리 일대 선술집은 술 판매를 줄이면서 전업형 성매매로 변해갔다. 미아리의 성매매업은 술을 팔 수 있는 업소로 등록한 뒤 성매매를 했기 때문에 전업형 성매매로 전환한 뒤에도 손님들에게 형식상 맥주 한 잔을 마시게 한 뒤 성을 판매하는 ‘텍사스’ 시스템으로 발전 시켰다. 단속을 나온 경찰이 윤락행위를 했다고 추궁하더라도 ‘단지 술을 팔았을 뿐’ 이라는 충분한 변명거리가 됐기 때문이다.

    이렇게 1960년대 후반까지 서울 지역의 매음골의 역사와 이동한 지역에 대해 알아봤다. 
    이젠 1970년 이후의 유흥과 매음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1968년 한강 종합개발 공사 계획의 일환으로 여의도를 개발하기 시작하였다. 이 전까지만 하더라도 여의도는 모래밭 투성으로 이뤄져있어 군사 비행장으로만 사용되었던 땅을 도심기능을 담당하고 중심부의 과밀지역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개발한 것이다.

    이 때 여의도를 개발과 동시에 강남도 개발이 시작되었다. 계획은 아주 원활하게 이루어졌다. 반포에서 당시만해도 섬이었던 잠실까지 개발계획을 발표하였다. 

    그래도 당시 정부의 개발은 거침없이 이루어졌다. 
    자양동과 잠실 섬을 잇는 잠실대교와 성수2가와 청담을 잇는 영동대교 건설과 잠실에는 운동장과 체육대학 설립을 추진한다. 그리고 자연임야 20여만평을 공원으로 지정하는데 그것이 지금의 올림픽공원이다.

    그 후 강남 상공부와 한전 등 12개 국영업체가 들어가는 종합청사를 짓는다고 발표를 한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논밭에 불과하던 강남은 하지만 강남으로 이전하려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결국 1976년 압구정과 잠실의 아파트에 주택구입시 면세 혜택을 주면서 사람들이 이주하기 시작한다.
    이 때 압구정의 땅값은 명동의 1/10 수준이었다. 또한 지하철 3,4호선이 도심을 거쳐 강남으로 진출하기로 계획이 바뀌게 되어 이 시기에 강남의 졸부들이 생겨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남은 점차 발전하게 되는데, 자료를 찾던 중 재밌는 기삿거리를 하나 찾았다.
    1980년 5월 기사인데 “을지로, 신설동, 인사동 등에 있던 가구상들이 소비자를 따라 논현동 네거리와 신사동 네거리로 이전” 이라는 기사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놀라운 사실을 유추할 수 있었다. 분명 앞서 설명했던 것처럼 을지로, 신설동, 인사동은 서울의 유명한 사창가가 있던 곳이었다. 사창은 돈있는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던 곳이었기 때문에 가구상들이 을지로, 신설동, 인사동 주변에 밀집해 있었을 것이란 말이다.

    그리고 창녀들은 돈 많은 사람들의 냄새를 기막히게 잘 찾아낸다. 그렇기 때문에 창녀들이 강남으로 유입이 된 시기도 이 때로 유추할 수 있겠다. 

    또 강남은 계속적으로 발전을 해 나가게 되면서, 로비나 접대가 필요한 건설회사 같은 곳에선 고급으로 대접을 하겠다면서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일을 벌였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서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호텔 수영장이나 고급 주점 등지로 창녀들이 퍼져나가게 되었을 것이고, 주점의 등급도 나뉘게 된 것이 아닐까 라는 것이 우리의 조심스러운 추측이다. 아마 고급 창녀들이 생겨난 시기도 이 때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1980년 이후 야간 통행금지가 해제되고 아시안게임과 서울올림픽이 개최되면서 3S산업을 양성해나가면서 서울의 매음골이 더욱 발전해 나가게 되었다.

    이번 서울특별시 편을 작성하기 위해서 조사한 자료의 양이 상당했다. 정말 서울은 너무나도 많은 일들이 벌어졌던 동네였고, 앞으로도 얼마나 더 많은 일이 벌어질 지 모르겠다.

    하지만 서울의 사창가가 종로에서 시작되었다는 점과 서울 외곽이 아닌 서울의 중심부를 기점으로 사방으로 퍼져나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성을 판매함에 있어서도 거리낌이 없었던 것 같았다. 

    대한민국의 유흥의 역사를 들추어보다 보니 단속이 심해지면 사창가는 점점 음지로 들어가는 것 같은 경우만 보더라도 예나 지금이나 돌아가는 세태는 다를 바가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단속을 피하는 새로운 무언가가 다시 생겨난다는 것이다.

    역사는 돌고 돈다는 말이 있듯이 유흥의 역사도 돌고 도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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